자신의 욕망의 탑 My Desire Tower
배가 고파서 음식을 어느 정도 먹으면 우리 육체의 위는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끝없이 먹고 먹자, 마시고 마시자, 갖고 더 갖자 라며 보챕니다.
이 마음이 갖는 욕망은 끝없습니다. 욕망에 끌려 가장 본질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부지기 수 입니다. 욕망은 추위나 더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또한 빈부 격차,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욕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치지도 않습니다. 욕망은 바쁘게 살든 한가하게 살든 따지지 않고 사람 마음속에서 무성한 수풀처럼 자라납니다.
욕망은 사람의 건강상태를 배려하지도 않습니다. 내일이면 죽을 사람에게도 마음의 욕망은 일어나서 그 사람의 생각과 의식을 지배합니다.
이 욕망은 절대로 포기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왕성합니다. 그래서 욕망에 붙잡히면 누구나 할 것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인생 싸움은 이런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닌데도 혈과 육에 대한 싸움으로 끌고 가는 것도 이 욕망입니다.
욕망으로 얻은 것은 모두들 망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욕망이 지배하게 되면 그 욕망은 영적인 세계에 눈을 멀어버리게 만듭니다.
욕망은 먹거리가 세상의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영적인 것을 구하거나 바라보거나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종 전혀 욕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욕망을 숨기고 위장시켜놓고 없는 것처럼 위선적인 삶을 살뿐입니다.
판소리 12마당 중에 별주부전이 있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토끼가 수궁에서 왕이 건강이 안 좋아 토끼 간을 먹어야 낫게 된다는 진단에 따라 토끼 자신 배속에 있는 간을 빼려고 수궁에는 사람들이 칼을 준비 할 때에 "나는 간을 육지에 놓고 왔다"고 토끼가 말하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어떻게 간을 뺏다 넣다 할 수 있느냐?"라고 수궁 사람들이 되묻자 "나는 얼마든지 넣다 뺏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육지에 빼놓고 왔으니 없고 그것이 못 믿어지면 지금 나의 배를 갈라서 한번 보여 주어볼까? 그러면 크게 다칠 수가 있다. 차라리 나를 따라와라 육지가면 줄 테니."라며 오히려 모의 협박을 합니다. 그렇게 태연한 토끼의 내면 모습 속에는 위선과 해악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거북이의 욕망은 결국 이뤄지지 못합니다.
조선 후기 작품 중에 실학파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이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군의 어떤 마을에서 어떤 한 양반이 삶의 현실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위선적인 삶만 일삼는 것에 혐오와 고발을 알리고 있습니다.당시 양반사회에 만연된 위선과 형식과 무능한 삶을 비판하고 풍자한 작품입니다.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들면서도 날마다 책만 읽고 손님이나 접대하고 고을 군수와 어울려 놀기만 하지 농사를 지어 스스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무책임함과 서민계층인 상민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위선 적인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반들이 자신들 만이 쌓아놓은 바벨탑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끼리만 살자고 갖은 위선을 떨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키우다보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그 공동체는 무너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능력자와 그럴듯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불어 살고자 자신들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욕망을 없게 하려면 내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함을 알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만을 위해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믿는자 되어지길 날마다 간구하겠습니다.
나를 만져 주옵소서
제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 가도록 십자가에
날마다 내가 죽는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