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예수
붕어빵, 작은 누구누라는 것은 먼저 그 사람의 모습이나 인격이 꼭 닮았다라고 인정할 때 쓰이는 호칭입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교회 앞 왕복 4차선 도로를 100여 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서 건너오는 두 노인부부를 봤습니다. 여유롭게 무단 횡단하는 그분들의 옆에는 성경책이 끼어 있었습니다. 경건하게 보이는 두 노인부부는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오늘도 무사히 지켜주옵소서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운전하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어떻게 봤을까 사뭇 궁금합니다.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짧은 거리에서 보여주는 폼은 아름답지만 멀리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겉에 모습은 멋진 예수쟁이였지만 그분들의 행함은 "나는 가짜 예수쟁이입니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비난하고 판단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의 치부를 보지 않고는 변화를 꿈꾼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기독교는 용서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용서가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쟁이는 사실을 사실로 말해야 하는 의무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 위해서 틀린 것은 틀렸다라고 담대하게 말해주어 고치게 해야 할 책무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도시에 속한 교회들이 계속해서 도둑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러운 것은 경찰도 그 도둑을 잡을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이 도둑이 1년 반 만에 잡힌 것입니다. 그 도둑이 목표했던 교회가 밤새 지키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자 마침 근처에 있던 교회를 들어갔습니다. 이 교회는 그가 1년 전에 들어가서 도둑질했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이교회에서 도둑은 잡혔습니다. 이 교회는 도둑을 맞은 뒤에 교회에서 남자집사들이 조를 짜 보안장치와 모니터를 통해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날 새벽 3시쯤 화장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그 도둑을 잡아서 경찰에 인계하여 그동안 200개교회 이상을 도둑질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교회 들어가 도둑질을 했느냐"라는 경찰심문에 "교회가면 도둑질하다가 들켜도 잘 용서해주니까 자꾸 하게 되었고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라고 진술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깨닫는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지 인식을 못하는 자에게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서는 아무리 값나간 호랑이가 되었든 사자가 되었든 상관없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했을 때는 경찰이 바로 사살시킵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깨닫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깨달을 때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남들이 틀렸다 라는 것을 너무 잘 꼬집어 내는데 전문가였지만 자신들은 절대로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였습니다. 자신들을 보는 데는 극도로 인색했습니다.
이 계절에 작은 예수로 찾아갑시다. 그들의 영혼에서는 작은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무렇게나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작은 예수들은 예수님의 분신 같은 존재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자신 안에 사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처럼 작은 예수쟁이들은 자신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작은 예수를 곳곳에서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