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일을 알고 하는 사람과 모르고 하는 사람의 평가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알고하는 사람은 기술자라는 칭호를 받고, 모르고 하는 사람은 보조자라는 이름으로 불려 집니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알고 사느냐 입니다.
인생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부담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삶을 알고 사는 사람은 존귀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인생은 알고 살아야 삶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인생을 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또한 주변으로 부터 존경받기도 어렵습니다. 때로는 모멸감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도 바르게 사는 방법을 꼭 알아야 합니다.
며칠 전 밤늦게 4호선 전철을 안양에서 타고 서울역 쪽으로 가는 중에 건너편 좌석에 예쁜 화분을 들고 들어 온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발밑에 그 화분을 놓고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깔깔거리고 전화를 하다가 그만 자신의 발로 발 밑에 놓아둔 화분을 툭 차버렸습니다. 여기저기 흙과 퇴비들이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수다는 계속되지만 치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 아가씨는 전화가 끝났는지 자기 앞이 아수라장이 된 채 그대로 놓고 자리에서 일어 출입구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 끝 노약자석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60대 후반 되신 아저씨가 그 아가씨를 가로 막아섰습니다. “아가씨, 이렇게 놓고 나가면 안돼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청소해야 돼요. 어서 치우세요.”라며 굳은 표정으로 다그쳤습니다. 그래도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않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는 아가씨를 향해서 “안 치울 것 같으면 내가 다 치울 때까지 나가지 마세요.” 큰 눈을 뜨고 한 마디를 더 던졌습니다. 그리고 신사복을 입은 키가 큰 아저씨는 무릎을 반쯤 꿇고 맨손바닥으로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화분에서 나온 부산물들을 쓸어 모아 아가씨가 들고 온 화분에 넣어주었습니다. 손바닥을 털고 일어난 신사 아저씨는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인생 똑바로 사세요.”라며 아가씨에게 충고를 던지고 노약자석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주변을 향해서 잔뜩 기분 나뿐 표정만 짓고 있다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않고 다음 역에서 내렸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을 알았다면 죄송해하고 미안해합니다. 더욱이 그런 무례한 일은 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배웠더라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고치려는 몸부림이 없으니 변화된 삶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결코 개인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자신만 거룩하고 경건하고 선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불의와 신앙적인 타락을 일깨워주지 못한다면 올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신앙은 불의를 개선하려는 용기와 열정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바르게 가르쳐주면 바르게 배워야 존귀함 받는 존재가 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고통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관찰하고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머리삼아 그분의 뜻을 알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영적이든 육신적이든 배우려면 똑바로 배워야 합니다. 바른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 가는데
열정을 다 쏟습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욕은 먹지 맙시다. 다 먹어도 욕먹지는 맙시다.
욕먹지 않으려고 배우지 말고 존귀한 삶을 살기 위해 알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칼럼
아무리 배고파도 욕만은 먹지 말자.

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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