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예수님에 관해서 아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아십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습니까?”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부분은 “나도 예수님을 안다.”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렇게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안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해서 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성격, 추구하는 점,
출생이력, 인적사항, 성장배경 등등에 ' 관해서만 아는 것' 입니다. 마치 젊은 사람들이 연예인들을
잘 안다고 말을 해서 물어보면 한결같이 그들의 생일, 신장,나이, 취미, 출신 학교
혈액형, 주소, 등등을 안다고 말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정작 그 연예인은 잘알고 있다는 나를 몰라볼 것이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이런 백과사전식으로 아는 것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은 '만남으로 아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 예수님을
내 심령 속에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 입니다. 그러니 늘 그분을 만날 수밖에 없겠지요,
교회를 다니다 보면 예수님에 관해서 많이들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요, 십자가에 피를 흘렸어요,
사랑이 많으시고,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많은 환자를 치료하셨음을 압니다.‘ 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심령 속에서는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멍가게에 가서 “아빠, 과자좀 주세요.”라고 말을 할 때에 상대방이 내가 그를 알고 상대방이 나를
안다면“응, 알았어.” 라고 말을 할 것이고
만나서 아는 것이 아니라면 ' 당신은 인자하고 마음씨가 곱고, 생년월일은 언제고 취미는 뭐고 하면서 내가 당신을 이렇게 잘 아니까 “과자 좀 주세요.” 하면 “야, 너는 누구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심령에 만남으로 아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남으로 안다면 우리가 곤고할 때에 도와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에 관해서만 알려고 한다면 많은 책들을, 많은 말들을, 많은 공부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론 창시자들인 맑스와 레닌은, 세상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라 신부가 되면 괜찮겠다 싶어 신학교에 들어가서 예수님에 관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들 머리 속에는 예수님은 도무지 계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을 통해서 알고 공부했던
것은 예수님에 관해서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없다”라고 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공산주의 이론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으며 지금도 당하고 있습니까. 지식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학문의 전당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성령의 주장함속에서 만나고, 교제를 함으로서 알아가는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그래서 글자를 전혀 모른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자나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학력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우리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철학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현실은 생명력이 있고 뜨거움이 있습니다. 땀이 있고, 울고 웃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철학은 머릿속에 있지만 신앙은 가슴에 자리합니다.
신이 살아있지 않으면 ‘~관해서’에 바쁩니다. 그러나 신이 살아있으면 ‘~을 만나’는데 바쁩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지식의 관계로 아는 것이 아니라 ' 만남으로 아는 현실' 입니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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